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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 걸 리뷰 (성장영화, 감정표현, 상실)

by Ann-story 2026. 4. 16.

 

성장 영화라고 하면 따뜻하고 잔잔한 결말을 떠올리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마이 걸을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상실이 이렇게 정면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요. 이 영화는 11살 소녀 베이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릴 때 얼마나 많은 감정을 혼자 삭이며 살았는지를 조용하게 되묻습니다.

베이다가 사는 세계, 그 배경이 남다른 이유 (베이다의 성장영화)

베이다는 장의사인 아버지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자랍니다.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늘 일에만 파묻혀 있습니다. 죽음이 일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정작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이 영화의 핵심 전제입니다.

흥미로운 건 베이다의 피부색입니다. 영화 속 설정에 따르면 감정 상태에 따라 안색이 달라지는데, 감정 표현을 억누르던 베이다의 얼굴은 항상 검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 억압의 시각적 메타포로 읽힙니다. 감정 억압이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의식적으로 밀어내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심리적 반응을 의미하며, 장기화될 경우 정서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어릴 때 저도 불안하거나 무서운 감정을 느끼면 그냥 참고 넘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거든요. 베이다를 보면서 그 시절 제 자신이 겹쳐 보였습니다.

베이다가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고 말해도 아버지는 건성으로 흘려듣습니다. 분장사 셸리가 찾아와 베이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 전까지, 아이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어른 한 명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이 영화는 그걸 아주 조심스럽게 보여줍니다.

토마스의 죽음이 전하는 것, 감정 표현의 임계점 (상실에 대하여)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면은 아마도 토마스와의 이별일 겁니다. 베이다의 친구 토마스는 잃어버린 반지를 찾으러 숲에 들어갔다가 벌떼에 쏘여 알레르기 반응, 즉 아나필락시스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아나필락시스란 특정 물질에 대한 면역계의 과민 반응이 전신으로 급격히 퍼지는 상태를 말하며, 적절한 처치가 없을 경우 수 분 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일상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가장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베이다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 장면이 저는 정말 오래 남았습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그동안 말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처럼 느껴졌거든요. 저도 살면서 예상하지 못한 이별을 겪었을 때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힘든지 그 순간엔 이해가 안 되다가, 나중에야 그게 단순히 그 사람을 잃은 슬픔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쌓인 감정들이 함께 터진 거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카타르시스의 묘사 방식입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려 있던 감정이 강렬한 경험을 통해 한꺼번에 해소되는 과정을 말하며, 심리치료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다뤄집니다. 베이다가 셸리에게 쌓인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은 그 전형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이 걸이 다른 성장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죽음이 일상인 환경을 배경으로 삼아 상실의 무게를 더욱 입체적으로 묘사합니다.
  • 어린 주인공의 감정 억압을 시각적 장치(안색의 변화)로 구체화합니다.
  • 성인 캐릭터의 무관심과 아이의 감정 사이의 간극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 토마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상실이 감정 해방의 계기가 됨을 보여줍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한 것, 감정 전달의 어려움

베이다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도 아내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일 뿐입니다. 결국 아버지도, 베이다도,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외면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영화 후반에서 아버지가 베이다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은 억지로 만들어낸 화해보다 훨씬 더 깊게 남습니다. 뭔가 대단한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닌데도 그 침묵과 시선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른이 돼서도 감정을 잘 전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저도 공감합니다. 베이다가 아버지에게 계속 엇갈리던 모습은 지금의 제 인간관계에서도 종종 보이는 장면이거든요. 표현하고 싶어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그 답답함이, 이 영화에서는 아이의 이야기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아동기의 정서 조절 능력이 이후 대인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정서 조절 능력이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고 상황에 맞게 조절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이 시기에 형성된 패턴이 성인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연구를 통해 꾸준히 확인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아동심리치료학회). 베이다가 토마스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그 아이의 정서 발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겁니다.

결국 마이 걸은 성장이 반드시 아름다운 방향으로만 흐르는 게 아님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상실을 겪고 나서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고, 아픔을 통과한 후에야 조금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이 영화는 억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입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던 그 시간이 저에게는 오히려 이 영화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가능하면 혼자, 여유 있는 시간을 두고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uMd4gEGW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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